SK그룹 서울 종로 사옥


더트래커 = 김상년 기자

자회사 SK온 지원과 자체 재무구조 개선 등을 위해 올들어 벌써 8조원 이상의 각종 외부자금을 조달해온 SK이노베이션이 지난 22일에는 6천억원 규모의 사모 전환사채(CB) 발행까지 의결했다. 이 회사 역사상 첫 사모 CB 발행이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22일 임시 이사회를 열고 6천억원 규모의 제1회 사모 전환사채 발행을 의결했다고 공시했다. 이 자금은 한국투자금융지주 자회사인 한국투자프라이빗에쿼티(한투PE) 컨소시움 등 FI(재무적투자자)들이 보유한 SK온 전환우선주(CPS) 지분을 매입하는데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2022년~23년 SK온에 프리 IPO(상장전 지분투자) 형식으로 지분투자한 FI들의 지분을 되사오기 위한 목적이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 6월 SK온의 자금난을 덜어주기 위해 발표한 SK온과 SK엔무브의 합병을 마무리 짓기 위한 것이다.

SK온은 아직 비상장사로, 최대주주는 SK이노베이션(보통주 지분율 86.98%)이고, 소액주주들도 보통주 기준 9.34%의 지분을 갖고 있다. 한투PE 등 FI들은 모두 5107만9105주의 전환우선주(CPS)를 갖고있다. 이 CPS는 보통주와 똑같은 의결권을 갖고 있어 의결권 기준 지분율로 따지면 FI들의 지분율도 8.5%에 달한다.

이번 CB의 청약 및 납입일은 오는 31일, 만기는 2027년 10월31일이며, 전환비율 100%에 전환가액은 주당 12만3642원이다. 전환 청구시 발행될 주식은 SK이노베이션 보통주 485만2796주로, 주식총수 대비 2.79%(합병후 SK온 지분 기준)라고 SK이노베이션은 밝혔다. 주식전환 청구는 2026년 10월31일부터 2027년 10월25일까지 가능하다. CB 금리는 0다.

사모 CB를 인수해줄 곳은 한국투자이스트브릿지 글로벌그린에너지 제1호 사모투자 합자회사 등 8곳이다. 모두 한투PE가 조성한 펀드들로 알려진다. SK이노베이션이 한투PE의 SK온 지분을 되사는데 들어가는 돈 일부를 FI인 한투PE가 다시 빌려주는 꼴이다.

SK이노베이션이 한투PE측 프리 IPO 투자지분을 되사는데는 1조2천억원 정도 소요되는데, 이중 절반인 6천억을 FI인 한투PE가 전환사채 투자 형태로 재투자하는 구조다. 일부 언론은 한투금융그룹이 SK그룹과의 동행을 이어나간다는 취지라고도 해석했다. 왜 이런 해석까지 나왔을까?

SK이노베이션의 지난 22일 전환사채 발행 공시

한투PE는 지난 2022년 SK온 프리IPO에서 앵커투자자로 참여, 8천억원을 투자했고, 2023년 후속투자로 4천억원을 더 투자했다. 글로벌 사모펀드들이 투자에 난색을 표시할 때 한투금융그룹이 흔쾌히 백기사로 나섰다고 한다.

이때 한투PE 컨소시움이 인수한 SK온 CPS는 만기 8년에 2026년까지 SK온 상장을 성공시킨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쌍방 협의에 따라 상장을 2028년까지 연기할 수 있는 조항도 있다고 한다. 한투PE 컨소시엄 FI들은 적격상장(Q-IPO)을 조건으로 7.5%의 내부수익률(IRR)도 보장받았다.

또 이 상장이 실패하거나 SK온과 다른 계열사와의 합병 등 변수가 생기면 금리 등 조건을 재협의한다는 조항도 당연히 붙어 있었다.

SK온 CPS의 발행조건들


이 때문에 자금난에 시달리던 SK온 지원을 위해 작년 SK온과 우량 계열사 SK엔텀·트레이딩인터내셔널과의 1차 합병을 추진할 때부터 당장 문제가 생겼다. FI들은 이 합병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주주간계약에 더 많은 권리를 요구했고, 그 덕에 청산 때 IRR 10% 이상의 회수 성과를 끌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SK온은 설립 때부터 끝없이 돈이 들어가는 SK그룹의 ‘블랙홀’ 같은 존재다. 2차전지 업체 특성상 거액 투자가 계속 필요한데다 중국 경쟁업체들의 저가 물량공세 등으로 심각한 영업부진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백업해주던 모기업 SK이노베이션 마저 정유및 석유화학 업종 전체의 부진으로 최근 몇년 간 계속 업황이 좋지 않다.

이 때문에 엄청난 차입 등도 모자라 우량 계열사들을 SK온과 계속 합병시키고, 작년에는 초우량 에너지기업이던 SK E&S를 SK이노베이션에 합병시키기도 했다. 이런 상황과 약점 때문에 SK이노베이션은 FI들의 이같은 고금리 재협상 조건도 어쩔수 없이 감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SK 측은 오랜 우호관계였던 한투금융에 대해 상당한 서운함도 내비쳤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토록 오래 서로 돕고 잘 지내왔는데,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한투 너마저 과한 요구로 몰아부칠 수 있느냐’는 서운함이었을 것이다.

일부 언론은 지난 8월 말 “오랜 단골관계이던 양 측 관계가 숨가빴던 올해 SK그룹의 사업조정(리밸런싱)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삐걱대기 시작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SK그룹이 각 계열사가 한국금융지주와 거래한 내역을 다시 들여다보고 앞으로 신규 계약을 결정할 때 지주사인 SK㈜까지 보고를 거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SK이노베이션이 지난 7월 말 합병계획과 함께 발표했던 재무구조개선계획


이 보도가 맞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실제 지난 7~8월 SK이노베이션과 SK온이 5조원을 조달할 때 창구는 한투금융이 아니라 메리츠금융이 맡았다. 이 5조원은 지난 7월 말 SK온과 SK엔무브의 합병 계획 발표 때 함께 추진된 외부투자 유치자금이다. SK이노베이션은 이 자금을 기존 FI들의 지분을 인수하는데 주로 사용할 계획이라고도 밝혔다.

지분 인수에만 약 3조5880억윈이 책정됐다. 한투PE 지분도 있지만 한투PE와 같이 투자한 MBK파트너스 등 다른 FI들과 SK엔무브의 FI 지분 등도 있어 금액이 이렇게 커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투PE 컨소시엄과 MBK컨소시엄 합쳐서 SK온 투자 원금은 2조8000억원, 작년 1차 합병 협상때 SK이노베이션이 보장한 수익률은 이미 연 복리 10%를 넘었다. 올해 추가 합병으로 SK온 덩치가 커지면 회수 문턱은 더 올라갈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점들을 모두 감안, SK측은 이번 기회에 FI 투자지분을 아예 모두 회수해버리자고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안그러면 이번 합병 관련 재협상 과정에서 FI들이 또 고리대금업자처럼 더 과도한 요구를 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SK이노베이션 전환사채의 다른 발행조건들


이번 전환사채의 발행조건들을 보면 SK온 CPS에 비해 SK이노베이션 측에 훨씬 유리해 보인다는 점이 또 눈길을 끈다. 금리부터가 0이고, 다른 악성(?) 조건들도 적어도 공시상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SK가 이런 호조건들을 제시했는지, 아니면 한투 측이 화해(?) 차원에서 그랬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IB업계의 한 관계자는 “올들어서만 벌써 8조가 넘는 자금을 조달했고, 또 전환사채는 한번도 발행한 적이 없는 SK이노베이션이 갑자기 전환사채로 6천억원을 또 조달한다고 해서 ‘이건 뭐지?’ 했다”면서 “증거는 없지만 앞으로도 SK와 계속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은 한투 측 제안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SK하이닉스의 대호황으로 작년보다 훨씬 자금사정이 나아진 SK그룹도 이 기회에 사모펀드들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강화하고 있는게 아닌가 추정된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SK이노베이션 로고


한편 SK이노베이션은 앞에서 언급한 5조원 외에 지난달 LNG 발전 자회사인 나래에너지서비스와 여주에너지서비스의 제3자배정 유상증자를 통해 3조원을 확보했다. 이를 통해 SK이노베이션은 올해 계획했던 8조원 자본 조달을 마무리짓는다.

8조원 조달의 일환으로 지난 8월에는 회사채 발행을 통해 최대 6천억원을 추가 확보한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내년 상반기 만기가 돌아오는 차입금 및 회사채 채무상환자금용이다. 2%대 후반에서 3%대 초반 금리로 지난달 초 회사채발행을 마무리지었다. 수요예측 경쟁률도 3대1을 넘었다.

그리고 이번에 또 전환사채 6천억원 발행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지난 7월 말 발표했던 올해 8조원 조달계획의 일환인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그 실행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은 확실한 것같다. SK온과 SK엔무브 합병 법인은 11월 1일 공식 출범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