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트래커 = 김상년 기자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담은 ‘더더 센’ 상법 개정안이 이번 정기국회 기간 중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보유 자사주를 어떤 방식으로든 처분해 버리려는 기업들의 이른바 ‘자사주 탈출’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가운데 보유 자사주를 상호 교환, 보유하는 사례까지 등장했다.
우호적인 기업들끼리 자사주를 서로 교환해 보유하고 있다가 경영권 분쟁 등 유사시 우호 지분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른바 ‘자사주 백기사’ 활용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30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상장 제약사 광동제약은 이날 정규장 시작 전 시간외대량매매 방식으로 보유 자사주 7.12%, 373만4956주를 주당 5900원, 220억원에 처분한다고 지난 29일 공시했다. 주당 매각가 5900원은 지난 29일 광동제약의 거래소 종가다.
광동제약은 과거부터 자사주 보유량이 많기로 소문이 많이 난 상장사 중 하나다. 이 처분 전 광동제약의 자사주는 발행주식의 25.1%, 1314만239주에 달했다. 이날 처분으로 자사주 보유량은 17.98%로 줄었지만 여전히 과다한 편이다.
광동제약이 이날 장외매각한 자사주 중 235만8940주(139억원)는 삼양패키징이 인수했다. 나머지 자사주는 삼화왕관(71만5천주)과 금비(66만1016주)가 인수했는데, 문제는 이 두 회사도 자사 보유 자사주를 해당 금액 만큼 광동제약에 똑같이 장외매각했다는 점이다.
삼화왕관은 같은 시간외대량매매 방식으로 보유 자사주 5.48%, 11만8천주를 주당 35750원(29일 종가), 42.18억원에 광동제약에 매각했다. 거래금액은 양 사가 똑같다. 사실상 자사주를 상호 교환한 셈이다.
상장사 금비도 광동제약 자사주 66만1016주를 받는 대신 자사의 자사주 6.5% 65000주를 주당 6만원, 39억원에 광동제약에 장외처분했다. 역시 자사주 상호교환이다.
광동제약 등 4사의 이날 자사주 거래는 모두 똑같은 30일 증시 개장 전 장외매각 방식으로, 거래시간도 똑같았다. 모두 광동제약과 오랜 거래관계가 있는 기업들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광동제약과 삼화왕관, 금비 3사는 이번 자사주 거래의 목적을 ‘지속적 사업협력관계 구축’이라고 모두 똑같이 밝혔다. 오랜 거래 관계인 4사가 자신들의 자사주 처분 방법 등을 놓고 사전에 충분히 협의한 증거로 보인다.
광동제약의 자사주 처분대상 선정 사유와 처분주식수
이날 자사주 거래로 삼화왕관의 자사주 보유량은 11.06%, 금비는 11.65%로 각각 줄어든다. 양 사와 광동제약은 이번 자사주 거래로 과다했던 자사주 보유부담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게 된 셈이다.
3사는 이번 거래의 목적을 ‘지속적 사업협력관계 구축’이라고 밝혔지만 경영권 분쟁 등 유사시 서로 우호지분으로 상대방 자사주를 활용할 수 있는 기반도 구축하게 되었다.
상장기업들이 보통 장내매수 등으로 자사주를 취득할 때 취득 목적을 보면 ‘주가안정과 주주가치 제고’라고 하는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말로 주가를 부양하고 주주가치를 높여 주려면 자사주 취득에만 그치지 말고 소각 처분까지 이어져야 한다는게 정설이다. 소각으로 발행 및 유통주식수가 줄어들면 그만큼 주주가치가 진짜 상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취득 자사주를 전량 소각까지 하는 기업들은 지금까지 많지 않았다. 많은 상장기업들은 오히려 경영권 분쟁시 우호세력에게 자사주를 넘겨 백기사로 활용하거나 주가가 오를 때 다시 팔아 차익을 챙기는 재테크용, 또는 임직원 인센티브 용 등으로 자사주를 더 애용해왔다.
이런 경우들을 가급적 막고 진정한 주주가치 제고와 주식시장 안정용으로 자사주를 주로 사용하도록 하자는게 새 정부와 여당의 입법 취지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이번 정기국회에 본격 추진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강제 소각 당하느니 법 개정 전에 서둘러 자사주를 처분해버리자는 움직임들이 노골적으로 벌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처분 방식으로는 자사주를 교환 대상으로 하는 교환사채(EB) 발행이 가장 많았고, 자사주를 외부에 매각하거나 임직원 인센티브용으로 처분하는 기업들도 있었다. 지난 8월 이후 30일 오전까지 자사주 기반 교환사채를 발행한 기업은 36곳에 달한다.
반면 정부·여당 입맛에 맞게 보유 자사주를 일부라도 소각 처분하는 기업들도 적지 않다. 교환사채 발행과 자사주 소각을 적절히 병행하는 기업들도 있다. 정부·여당 눈치도 보면서 실속도 차리자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이 와중에 자사주를 상호교환하는 사례까지 등장한 것이다.
IB업계의 한 관계자는 “사업협력관계 구축용이라고 설명하지만 유사시 백기사로 활용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자사주 기반 교환사채 발행에 대한 비판여론이 많아지자 이런 방식까지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 24일까지는 자사주 기반 교환사채 발행이 많았지만 25일 이후 30일 오전까지는 교환사채 발행이 한 건도 없고, 대신 소각이나 매각, 상호교환 방식 등이 많아지고 있다.
지난 25일에는 에스트래픽과 더네이쳐홀딩스 등 2개사가 보유 자사주 일부 또는 전부를 소각처분할 예정이라고 공시했다. LS일렉트릭은 임직원 인센티브용으로 보유 자사주 31810주를 임직원들에게 지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난 26일에도 HPSP및 지에이이노더스 등 2개사가 임직원 보상용으로 일부 자사주를 처분한다고 공시했다.
29일에는 광동제약과 삼화왕관, 금비 등 3사 외에 대동고려삼과 엑세스바이오 등 2개사가 보유 자사주 전량을 소각처리한다고 공시했다. 특히 엑세스바이오의 경우 내년 4월30일 소각 예정인 자사주가 255만3998주, 393억원어치에 달한다. 광동제약 등 3사와 뚜렷이 대비되는 행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