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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트래커 = 김상년 기자

부채가 아닌 자본으로 인정해주지만 발행금리가 높은데다 몇년 후 사실상 원금을 갚아야하는 콜옵션이 대부분 붙어있어 주로 금융회사들이 자본보강 목적으로 자주 애용하는 신종자본증권 시장에 지난 달부터 비금융 일반기업들이 갑자기 많이 뛰어들고 있다.

2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DL그룹의 석유화학 계열사인 DL케미칼은 지난 달 26일 제1회 사모 채권형 신종자본증권 2500억원 발행을 공시했다. 청약 및 납입일은 29일이고, 발행목적은 차입금 상환 및 운영자금용이라고 밝혔다.

대부분의 신종자본증권들처럼 만기 30년에 발행사가 원하면 계속 연장이 가능해 사실상 만기가 없다고 보면 된다. 물론 나중에 누적된 것을 다 갚아야 하지만 사정이 있을 경우 일정 기간 이자지급 유예도 가능하다.

공모에 비해 절차가 상대적으로 간편하고 수요예측 경쟁률 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모 발행이어서 신종자본증권 매입 대상도 주관 증권사가 알음알음으로 주선해준다.

DL케미칼의 제1회 사모 신종자본증권 발행 공시


문제는 상대적 고금리에다 몇년 후 콜옵션을 통해 발행사가 원금을 상환하지 않으면 금리가 계속 더 높아지는 이른바 ‘금리 스텝업(금리상향)’ 조항이 있다는 점이다. 이번 DL케미칼 신종자본증권의 최초 발행금리는 5.116%이고, 3년 후 DL케미칼이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으면 해가 갈수록 가산금리가 계속 붙어 금리가 계속 높아지는 조건이 붙어있다.

5%가 넘는 최초 금리부터가 현재 회사채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다른 대기업들에 비하면 크게 높은 수준이다. 대형 시중은행 같은 초우량 금융회사들의 현재 회사채 발행금리는 연 2.4~2.5%대까지 떨어져 있다. 다른 웬만한 일반 대기업들의 발행금리도 2%대 후반에서 3%대 전반으로 형성돼 있다. 4%대만 넘어가도 높다고 하는 상황이다.

여기에 3년 후 원금을 상환하지 못하면 금리는 더 올라간다. IB업계의 한 관계자는 “DL케미칼도 이를 모를 리 없을텐데, ‘제1회’라는데서 알 수 있듯 이처럼 신종자본증권 시장에 처음 뛰어드는 것은 그만큼 다급한 상황 등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악화된 석유화학업계 업황 때문에 어차피 고금리로도 회사채 발행이나 금융기관 차입이 어려울 바에야 부채가 아닌 자본으로 분류돼 부채비율 부담만은 덜어주는 신종자본증권을 택했을 수도 있다.

지난 26일에는 DL케미칼 외에 롯데지주와 콘텐트리중앙 등 다른 2개사도 각각 신종자본증권 발행 과 신종자본대출 이용을 공시했다.

롯데지주의 제3회 신종자본증권 발행 공시


롯데지주도 이번 신종자본증권 발행이 이 회사 역사상 3번째다. 역시 사모 발행으로, 채무상환자금용 500억원을 모으는데 붙인 발행금리가 4.723%다. 만기 30년에 계속 연장이 가능하지만 역시 스텝업 조항 때문에 2년 후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으면 금리는 더 올라간다. DL케미칼보다 콜옵션 기한이 더 짧다.

고금리 스텝업 조항을 감수하고 2년 후 콜옵션 행사조건을 무시할 수도 있지만 그럴 땐 더 큰 부담이 지워질 수 있다. 신종자본증권 등의 콜옵션 행사는 기한이 되면 당연히 행사하는게 관련업계의 불문율 또는 관행처럼 되어있기 때문이다.

만약 뚜렷한 이유없이 콜옵션 행사 관행을 어길 경우 안그래도 좋지않은 롯데지주와 롯데그룹 전체 신용도에 엄청난 타격이 더 가해질 수도 있다. 2022년 말 태광산업그룹의 흥국생명이 큰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5% 가까운 고금리에 스텝업 조항, 2년 후 콜옵션 등은 과거 호황기 때의 롯데그룹이나 롯데지주였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굴욕적인 조건들이다. 사실상 2년 만기 고금리 대출이다. 그만큼 롯데케미칼의 업황 악화 지속과 유통업종의 장기불황 때문에 그룹 지주사까지 자금시장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앙그룹 계열의 드라마및 영화제작기업인 콘텐트리중앙은 신종자본증권이 아니라 신종자본대출을 공시했다. 하지만 회사채가 아니라 대출이란 점만 다를 뿐 내용은 비슷하다. 재무구조개선및 유동성 확보용으로 420억원을 빌리는데, 발행금리가 연 8.4%에 달한다.

만기 30년에 계속 연장할 수 있고, 2년 후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으면 금리가 계속 올라가는 스텝업 조항 등도 신종자본증권과 비슷하다. 다만 중앙그룹 지주사인 중앙홀딩스가 자금보충및 조건부 채무인수 약정까지 제공한 점이 다른 기업의 신종자본증권과 다른 점이다.

발행 금리가 8.4%에 달하는데도 혹시 떼일까봐 지주사 약정까지 더 붙이라고 강요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중앙일보, JTBC 등을 거느리고 있는 중앙그룹 전체의 자금사정이 빠듯한 증거로 추정된다.

콘텐트리중앙의 신종자본대출 약정 체결 공시


하루 전인 지난 25일 종편방송 JTBC도 사모 신종자본차입 방식을 통해 운영자금 400억원을 조달한다고 공시했다. 신종자본차입이나 신종자본대출 모두 같은 것인데, 이름을 ‘대출’이 아니라 ‘차입’이라고 붙였다. 이 신종자본차입의 발행금리도 8.1%에 달한다. 콘텐트리중앙과 함께 올해 신종자본증권(대출)을 발행한 기업들 중 단연 최고 금리다.

2년 후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으면 금리가 더 올라가는 스텝업조항 역시 있다. 이 건 역시 중앙홀딩스가 자금보충및 조건부 채무인수약정을 체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콘텐트리중앙에 신종자본대출을 해주는 대주는 에이치와이중앙제4차이고, JTBC 대주는 에이치와이프로그램제1차란 곳이다. 같은 사모펀드가 조성한 투자조합들로 추정된다.

이들 외에 HD현대오일뱅크 및 HL D&I도 지난달 25일과 23일 각각 사모 후순위사채(신종자본증권) 발행을 각각 공시했다. 모두 요즘 고전하고 있는 정유 및 석유화학업체와 건설업체다.

HD현대오일뱅크 신종자본증권은 운영자금 300억원, 채무상환자금 700억원 등 모두 1천억원 규모이고, 표면이자율은 4.75%다. 역시 높은 편이다. 5년 후부터 콜옵션 행사가 가능하고 행사하지 않을 경우 금리가 더 올라가는 스텝업 조항이 붙어있다.

HL D&I 신종자본증권은 채무상환자금용 800억원에 표면이자율 6.525%다. 역시 높다. 콜옵션 행사 시작도 2년으로 HD현대오일뱅크보다 짧다.

HD현대오일뱅크 신종자본증권 발행 공시


비금융 대기업들의 신종자본증권 발행은 올들어 지난 8월 이전에는 손을 꼽을 정도였다. 지난 5월의 CJCGV와 7월 말의 제주항공이 전부였다. 둘다 모두 역시 자금사정이 빠듯한 기업들이다. CJCGV는 400억원을 조달하려다 수요예측 미달 때문에 1백억원 밖에 조달하지 못했고, 제주항공(1천억원) 신종자본증권 발행금리는 연 6.5%였다. 콜옵션도 2년후부터 행사해야하는 조건이다.

올 1~8월 2곳 정도만 발행했는데, 9월 하순 들어 갑자기 6곳이 발행했으니, 9월 하순부터 발행이 급증하고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시중자금난이 더 심해지거나 확산하는 것 때문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일부 한계 대기업들의 자금사정이 더 빠듯해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같다.

금융지주나 대형 은행 및 보험사들의 신종자본증권 또는 후순위채 발행은 올들어서도 그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일반 회사채보다 금리는 1~2% 높지만 3~5년 후 콜옵션을 행사할 자금력들이 충분한 금융사들이라 큰 부담없이 신종자본증권을 수시로 발행했다.

주로 일시적으로 떨어진 BIS자기자본비율이나 K-ICS비율(보험사의 지급여력비율) 등을 맞추기 위한 목적들이 많았다. 자금난이 심해서라기보다 일시적 자본 보강용들이라고 볼 수 있다.

대형 은행을 끼고있는 금융지주사들의 경우 현재 신종자본증권 발행금리가 3%대 초반까지 떨어져 있다. 은행이 없는 한국투자금융지주나 메리츠금융지주가 4%대이고, 다른 금융사들도 5%선을 넘는 곳이 많지 않다.

지난 3월 흥국화재가 6.1% 금리(2천억원, 수요예측 미달)로 발행한 적이 있고, ABL생보(후순위채, 3월, 5.7%, 수요예측 미달), 메리츠캐피탈(6월, 500억원, 5.39%), 아이엠캐피탈(9월, 1천억원, 5%), DB생명(후순위채, 2월, 5.03%) 등 정도만 5%를 넘었다.

HL D&I 신종자본증권 발행 공시


다시한번 정리하자면 올들어 신종자본증권이나 후순위채를 발행한 비금융 대기업들을 보면 대부분 현재 업황악화 등으로 자금난이 심한 곳들이다. 회사채 발행이나 금융기관 차입이 여의치 않고, 부채비율 등도 감안, 아예 신종자본증권이나 후순위채로 돌리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나친 고금리와 2~3년 후 다시 원금을 상환해야하는 부담이 문제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오죽하면 신종자본증권까지 생각해야하는지 입장은 이해가지만 사실상의 고금리 단기대출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것”이라며 “콜옵션 행사 전까지 업황 회복이나 구조조정 등을 서둘러야 할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