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트래커 = 김상년 기자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담은 ‘더더 센’ 상법 개정안이 이번 정기국회 기간 중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보유 자사주를 어떤 방식으로든 처분해 버리려는 기업들의 ‘자사주 탈출’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지난 8월 이후 이런 움직임이 크게 늘고 있긴 하지만 특히 이달 중순 이후 그 숫자가 더 폭증하고 있다. 자사주를 교환 대상으로 하는 교환사채(EB) 발행이 가장 많고, 자사주를 매각하거나 임직원 인센티브용으로 처분하는 기업들도 있다.
반면 정부·여당 입맛에 맞게 보유 자사주를 일부라도 소각 처분하는 기업들도 적지 않다. 교환사채 발행과 자사주 소각을 적절히 병행하는 기업들도 있다. 정부·여당 눈치도 보면서 실속도 차리자는 의도로 보인다.
24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자사주 탈출 방법 중 가장 많은 사례는 자사주를 교환대상으로 하는 교환사채(EB) 발행으로, 지난 8월 이후 24일 오전까지 모두 35개 기업이 이 방식을 공시했다.
특히 지난 15일 이후 이 방식을 공시한 기업이 19개에 달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이 방식의 탈출을 공시하는 기업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얘기다.
24일 오전만 해도 KCC가 보유 자사주 활용계획을 공시했다. 지난 6월 말 기준 KCC의 자사주 보유량은 전체 발행주식의 17.24%(153만2300주)에 달할 정도로, 자사주가 많은 기업들 중 하나로 꼽혀왔다.
KCC는 자사주 중 9.9%(88만2300주)를 올 4분기 중에 교환사채로 발행하고, 3.9%(35만주)는 올 4분기부터 내년 1분기 중 소각하겠다고 밝혔다. 또 3.4%(30만주)는 올 4분기부터 내년 1분기 중 사내근로복지기금에 출연하겠다고도 공시했다. 내년 1분기까지 이 3가지 방법을 동원, 보유 자사주 전량을 모두 처분하겠다는 얘기다.
이 회사는 지난 1997년부터 주가안정, 흡수합병, 인적분할 등 여러 이유로 꾸준히 자사주를 취득해왔다. 그동안 자사주 매각 처분은 여러 번 있었으나 소각은 1999년 73만주 소각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자사주를 교환대상으로 하는 교환사채 발행도 이번이 처음이다.
하루 앞인 지난 23일에도 서플러스글로벌, 인탑스, HLB바이오스텝, 상아프론테크 등 4개 상장사가 자사주 기반의 교환사채 발행을 공시했다. 이 중 인탑스를 제외한 3사는 보유 자사주 전량을 이번에 모두 EB 발행으로 처분하는 것이다.
이날 또 KT&G와 휴비츠, 인터로조 등 3사는 자사주 소각을 발표했다. 또 방림은 자사주 20만9215주를 임직원 상여금 용으로 지급한다고 공시했고, 비상장사인 무신사는 자사주 52310주를 임직원 대상 양도제한조건부주식용으로 처분한다고 공시했다.
지난 22일에도 넥센, 대교, 데브시스터즈,에스엠씨지, 덕성 등 무려 5개사가 자사주 기반 교환사채 발행을 공시했다. 하루 5개사는 지금까지 자사주 교환사채 발행 중 최고 기록이다.
이 중 데브시스터즈는 대부분의 자사주 EB 발행기업들이 붙이는 2년 후 풋옵션(조기상환청구권) 조항과 함께 2년 후 콜옵션 조건도 붙여 눈길을 끌었다. 자사주 소각의무가 법으로 강제되는 경우 발행사인 데브시스터즈가 EB를 사 간 증권사 등에게 도로 팔아줄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그나마 정부·여당을 많이 의식하는 콜옵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날 상장사 대동스틸은 보유 자사주 8.63% 86만주 중 15만주를 리딩투자증권에 주당 3429원, 5.14억원에 매각한다고도 공시했다. 대부분의 EB 발행이 10~20% 할증 매각인 반면 이 매각은 5% 할인가였다.
지난 19일에는 웰크론과 대화제약 등 2개사, 18일에는 셀바이오휴먼텍, 17일에는 테스와 에스에스티 등 2개사가 자사주 교환방식 교환사채 발행을 공시했다.
반면 지난 17일 태웅로직스는 보유 자사주 전량(175만주)을 소각(100만주)과 임직원대상 특별격려금(75만주) 용으로 각각 처분한다고 공시했다. 금호석유화학도 지난 16일 자사주 42만7845주, 500억원어치를 소각한다고 공시했다.
지난 15일에는 DB하이텍, 비에이치, 큐알티, 쎄니트 등 4사가 자사주 교환대상 교환사채 발행을 공시했다. DB하이텍의 EB 교환대상 자사주는 이 회사가 보유 중인 전체 자사주 9.35% 중 5%에 달하는 222만주이고, 이 방식의 EB 발행액만 1256억원에 달했다.
DB하이텍은 이렇게 마련된 자금을 상우공장 South Fab 클린룸 확장 및 유틸리티 공사(1006억원)와 차세대 전력반도체 양산 투자(250억원) 등 시설자금으로 주로 사용할 계획이라고 친절하게(?) 공시하기도 했다.
DB하이텍은 EB 발행 외에도 89만4천주의 자사주에 대해선 소각(460억원) 조치도 병행하겠다고 밝혔다. 적당히 정부·여당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에이치도 보유 자사주 364만8895주(10.59%)를 이번에 전량 처분하되 75만2841주는 소각, 164만6054주(4.78%)는 PRS(주가수익스왑) 방식의 매각, 나머지 125만주(3.6%)는 자사주 교환대상 사모 교환사채 발행 방식으로 나눠 처분한다고 공시했다.
동성케미컬은 이날 자사주 89676주를 장기근속 종업원 87명 포상용으로 처분한다고 공시하기도 했다.
지난 15일 이후 자사주 교환방식 교환사채 발행을 공시한 19개 기업을 보면 모두 발행 절차가 간편하고 증권신고서를 내지 않아도 되는 사모 발행 형식이란 점, 또 이전에는 자사주 기반 EB 발행이 거의 없었다는 점, 교환가액이 모두 10~20% 할증가라는 점, EB 교환 청구가 모두 EB 발행일 한달 이내라는 점 등의 공통 특징을 갖고 있다.
IB업계의 한 관계자는 “대부분 시설자금이나 운영자금, 채무상환용 자금이 필요해 자사주를 EB 형식으로 처분한다고 했지만 누가 봐도 자사주 소각 의무화 전에 서둘러 탈출하자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고 말했다.
상장기업들이 보통 장내매수 등으로 자사주를 취득할 때 취득 목적을 보면 ‘주가안정과 주주가치 제고’라고 하는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말로 주가를 부양하고 주주가치를 높여 주려면 자사주 취득에만 그치지 말고 소각 처분까지 이어져야 한다는게 정설이다.
소각으로 발행 및 유통주식수가 줄어들면 그만큼 주주가치가 진짜 상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취득 자사주를 전량 소각까지 하는 기업들은 지금까지 많지 않았다. 많은 상장기업들은 오히려 경영권 분쟁시 우호세력에게 자사주를 넘겨 백기사로 활용하거나 주가가 오를 때 다시 팔아 차익을 챙기는 재테크용, 또는 임직원 인센티브 용 등으로 자사주를 더 애용해왔다.
이런 경우들을 가급적 막고 주주가치 제고와 주식시장 안정용으로 자사주를 주로 사용하도록 하자는게 새 정부와 여당의 입법 취지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이번 정기국회에 본격 추진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강제 소각 당하느니 법 개정 전에 서둘러 자사주를 처분해버리자는 움직임들이 노골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 운동기간 중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가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공약으로 내걸기 전까지만 해도 자사주를 교환대상으로 하는 EB 발행은 1년에 몇차례 있을까말까 했다. 자사주가 교환대상이 아닌 경우들까지 포함해 작년 전체 EB 발행도 11건에 그쳤다. 여러 이유로 CB(전환사채)나 BW(신주인수권부사채)에 비해 EB 발행 자체가 많지 않았다.
정권 교체로 자사주 소각 의무화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자 SNT홀딩스나 SNT다이내믹스 같은 SNT 계열사들은 이미 지난 5월에 자사주 기반 EB를 발행, 조기탈출(?)에 성공하기도 했다. 다만 설마설마했는지, 다른 상장사들의 관련 움직임은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지난 7월 태광산업이 자사주 기반 EB를 발행하려다 2대 주주가 소송을 거는 바람에 지금까지 잠정중단 상태에 빠져있는게 거의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8월부터 갑자기 자사주 기반 EB발행이 이처럼 봇물터지듯 이어지고 있다. 실제 정기국회에서 입법 움직임이 구체화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난 16일 대한상의는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오히려 주가부양을 저해하고 다양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어 입법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구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보고서는 자사주 소각이 의무화될 경우 결국 기업의 자사주 취득 유인이 약화돼 결과적으로 취득에 따른 주가부양효과가 사라지는 부정적 영향이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해외 주요국 가운데 자사주 소각을 법으로 의무화한 국가가 드물며,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석유화학 등 현재 진행 중인 주요 산업분야의 구조조정을 어렵게 할 수도 있다고도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