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트래커 = 김상년 기자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담은 ‘더더 센’ 상법 개정안이 이번 정기국회 기간 중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11일에 이어 12일에도 보유 자사주를 어떤 방식으로든 처분해버리려는 기업들의 ‘자사주 탈출’이 이어졌다. 지난 8월 이후 이런 움직임이 크게 늘고 있긴 하지만 특히 지난 주 후반에는 그 숫자가 더 폭증했다.
여전히 자사주를 교환대상으로 하는 교환사채 발행이 많았지만 계열사나 우리사주조합, 유공 계열사 임직원 등에 자사주를 매각하거나 임직원 인센티브용으로 처분하는 기업들도 있었다. 반면 정부-여당 입맛에 맞게 보유 자사주를 일부 소각 처분하는 기업들도 있었다.
13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쿠쿠홀딩스는 지난 12일 자사주를 교환대상으로 하는 사모 교환사채(EB)를 발행한다고 공시했다. 교환대상 자사주는 231만1542주(6.5%)이며 주당 39050원의 교환가액(15% 할증)으로 902억6571만원의 자사주를 처분한다고 밝혔다.
납입일은 9월22일, 교환청구 시작은 1주일 후인 9월29일부터 가능하다. EB 발행 이유는 운영자금용이며 교환사채 금리는 0%, 만기는 2030년9월22일, 교환비율 100%에 2년 후부터 풋옵션(조기상환청구권)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 처분 전까지 쿠쿠홀딩스의 자사주 보유량은 448만3800주, 12.61%였다. 보유 자사주 절반 가까이를 이번에 한꺼번에 EB 형식으로 사실상 매각하는 것이다. 2021년 이후 이번 매각 이전까지 이 회사의 자사주 소각이나 처분은 전혀 없었다.
이번 EB를 인수하는 곳은 최근의 EB 발행 사례들처럼 증권사들이 많다. NH-삼성-KB-한국투자-신한-키움-메리츠-디에스-아이엠증권 등이 대거 인수대열에 참여했다. 신한캐피탈과 씨에스어드바이저스, 린드먼뉴딜신성장사모투자합자회사 등도 일부 EB를 인수했다.
KH바텍, 삼호개발, 그린케미칼 등의 상장사들도 12일 자사주 기반의 EB 발행을 잇따라 공시했다. 제일테크노스는 하루 전인 지난 11일자로 자사주 기반 EB 발행을 공시했다.
모두 사모 발행이고, KH바텍(6.93%)과 그린케미칼(2.81%)은 보유 자사주 전량을 이번에 처분한다. 삼호개발은 보유 자사주 10.56% 중 4.81%, 제일테크노스는 7.6% 중 3.92%를 이번에 각각 처분한다.
11, 12일 이틀 동안 모두 5개 상장사가 자사주를 교환대상으로 하는 EB 발행을 공시했다. 8월 이후 지난 10일까지 모두 16개사가 유사한 움직임을 보였던 것과 비교하면 움직임이 더 가속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0일 이전 EB 발행 기업들처럼 11, 12일 발행 기업들도 모두 운영자금 또는 시설투자자금 확보용으로 자사주 기반 EB를 발행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부분 최근 수년간 보유 자사주 소각이나 처분 움직임이 거의 없었고, 이번 발행 형식도 모두 발행 절차가 사모 발행이란 점, 또 인수자가 증권사 아니면 투자조합 등이라는 점 등으로 볼때 정부-여당에 의해 자사주가 강제 소각되기 전 서둘러 처분해버리자는 의도가 다분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삼호개발만은 보유 자사주 10.56%(264만주) 중 4.81%(113만주)를 EB로 발행하는 것과 함께 3.5% 88만주는 소각하겠다고 밝혔다. 정부-여당과 여론을 어느 정도 의식한 조치로 보인다.
보유 자사주를 다른 방식으로 처분하는 상장사들도 지난 11, 12일 많았다.
동일제강은 12일 보유 자사주 6.54% 전량을 시간외 대량매매 방식으로 처분한다고 공시했다. 매각 대상은 지주사이자 동일제강 최대주주(41.63%)인 에스폼이고, 에스폼의 최대주주는 동일제강그룹 개인최대주주인 김준년 회장(69%)이다. 그룹회장 개인 회사에 자사주 전량을 매각한 셈이 된다.
이번 자사주 매각으로 에스폼의 동일제강 지분율은 48.17%로 더 높아졌다. 동일제강은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사주를 전량 처분했다고 밝혔지만 지난 6월 말 동일제강의 현금및현금성자산은 460억원, 유동자산은 1129억원인 반면 유동부채는 174억원에 불과했다.
6월 말 이익잉여금과 순자산(자본총계)도 각각 1025억원, 1557억원에 달한다. 철강경기 악화 등으로 최근 3년간 소폭 영업적자가 지속되고 있긴 하지만 누가 봐도 보유 현금 등 유동성이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
또 이번 매각 이전 자사주 소각이나 처분은 최근 몇년간 한번도 없었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 전에 자사주를 지주사에 매각하고 현금을 확보하자는 의도로 보인다.
상장사 에이프로는 12일 자사주 40330주(2.54억원)를 사기 증진 목적으로 임직원 41명에게 스톡그랜트 형식으로 지난 8월 중 나누어 지급했다고 공시했다. 같은 날 이지케어텍은 보유 자사주 1.67% 전량(11만3862주)을 주당 15687원(매각가 17.86억원)에 우리사주조합에 유상출연한다고 공시했다. 무상지급이 아니라 매각한다는 뜻이다.
같은 날 비즈플레이도 자사주 46696주를 주당 1865원(8709만원)에 계열사 트래포트 임직원 3명에게 매각한다고 공시했다. 처분목적은 전략적 사업관계 강화라고 밝혔고, 처분 상대방을 선정하는 이유는 이들 트래포트 임직원들이 비즈플레이와의 제휴사업 관련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IB업계의 한 관계자는 “임직원, 우리사주조합 등에 자사주를 무상 또는 매각하는 에이프로 등 3사의 경우 동일제강이나 교환사채 발행 형식으로 자사주를 처분하는 기업들에 비하면 그나마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의 선의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자사주를 강제 소각당할 바에야 다른 방식으로 미리 처분한다는 의도에선 비슷하다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과 달리 KT&G는 최근 장내매수한 자사주 218만9745주(3천억원 상당) 전량을 오는 17일 소각한다고 12일 공시했다. 지난 2월 330만주 소각에 이어 올들어 두번째다. 2차례 소각 후에도 자사주 보유량은 11.6%로, 여전히 많은 편이다.
하지만 취득한 자사주를 전혀 소각하지 않고 계속 보유만 하다 최근 서둘러 EB 발행 등의 편법으로 서둘러 대피시키는 기업들에 비하면 그래도 상대적으로 여론을 의식하는 편이라고 볼 수 있다.
네오위즈홀딩스도 취득 자사주 22만7563주(50억원)를 오는 30일 소각한다고 12일 공시했다. 이 회사도 지난 2월 자사주 26만3020주 소각에 이어 올들어 두번째 소각이다. 지난 2월에는 또 스톡옵션 형식으로 자사주 1만주를 처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회사의 지난 6월 말 자사주 보유비율도 아직 28.05%(241만주)로, 여전히 크게 높다는게 문제다.
한편 상장기업들이 보통 장내매수 등으로 자사주를 취득할 때 취득 목적을 보면 ‘주가안정과 주주가치 제고’라고 하는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말로 주가를 부양하고 주주가치를 높여 주려면 자사주 취득에만 그치지 말고 소각 처분까지 이어져야 한다는게 정설이다.
소각으로 발행 및 유통주식수가 줄어들면 그만큼 주주가치가 진짜 상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취득 자사주를 전량 소각까지 하는 기업들은 지금까지 많지 않았다. 많은 상장기업들은 오히려 경영권 분쟁시 우호세력에게 자사주를 넘겨 백기사로 활용하거나 주가가 오를때 팔아 차익을 챙기는 재테크용, 또는 임직원 인센티브 용 등으로 자사주를 더 애용해왔다.
이런 경우들을 가급적 막고 주주가치 제고용으로 가급적 자사주를 사용하도록 새 정부와 여당이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이번 정기국회에 본격 추진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강제 소각 당하느니 법 개정 전에 서둘러 자사주를 처분해버리자는 움직임들도 노골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