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정기국회 회기중 자사주 소각 의무화 법개정을 공언한 민주당


더트래커 = 김상년 기자

2차 상법 개정안 국회 통과 이후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담은 ‘더더 센 상법 개정안’ 논의가 본격화되자 법 개정 전 자사주를 빼돌리려는 교환사채(EB) 발행이 급증하고 있다. 대부분 보유 자사주 전량 또는 대부분을 교환대상으로 하는 EB다.

EB는 채권 매입자에게 EB 발행기업 보유 상장주식을 교환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회사채다. EB 매입자가 자사주 교환 청구만 하면 EB 발행기업이 EB 매입자에게 자사주를 매각한 것과 같은 결과가 된다. EB 발행이라는 형식으로 사실상 자사주를 서둘러 매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상장기업들의 자사주 취득 또는 매입 목적을 보면 ‘주가안정과 주주가치 제고’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말로 주가를 올리고 주주가치를 높여 주려면 자사주 매입에만 그치지 말고 소각 처분까지 해야한다는게 정설이다.

소각으로 발행 및 유통주식수가 줄면 그만큼 주주가치가 진짜 상승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유 자사주를 소각까지 하는 기업들은 지금까지 많지 않았다.

많은 상장기업들은 오히려 경영권 분쟁시 우호세력에게 자사주를 넘겨 백기사로 활용하거나, 주가가 오를때 팔아 차익을 챙기는 재테크용, 또는 임직원 보상 인센티브 용 등으로 자사주를 더 애용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케이스들을 가급적 막고 오로지 주주가치 제고용으로만 사용하도록 정부-여당이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본격 추진하자 이번 정기국회 법개정 전에 서둘러 자사주를 처분해버리자는 움직임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SKC의 지난달 11일 자사주 처분 공시


10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8월 이후 10일 현재까지 자사주를 교환대상으로 하는 EB 발행을 공시한 상장기업들은 모두 16개에 달한다. 공시가 가능할 날짜를 기준으로 할 때 이틀에 한 곳 꼴로 발행 공시가 이어졌다.

지난 대통령 선거 운동기간 중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자사주 소각 의무화 공약을 내걸기 전까지만 해도 자사주를 교환대상으로 하는 EB 발행은 1년에 몇번 있을까 말까였다. 작년 전체 EB 발행도 11건에 그쳤다. 여러 이유로 CB(전환사채)나 BW(신주인수권부사채)에 비해 EB 발행 자체가 많지 않았다.

정권 교체로 자사주 소각 의무화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자 SNT홀딩스나 SNT다이내믹스 같은 SNT그룹 계열사들은 이미 지난 5월에 자사주를 교환대상으로 하는 EB를 발행, 조기탈출(?)에 성공하기도 했다. 다만 긴가민가 했는지 다른 상장사들의 관련 움직임은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지난 7월에는 태광산업이 자사주 기반 EB를 또 발행하려 했지만 2대주주가 소송을 거는 바람에 현재까지 잠정중단 상태에 빠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8월 여름 집중휴가철이 끝나면서부터는 자사주 기반 EB 발행이 봇물 터지듯 이어지고 있다.

8월11일 SKC와 농업용 약제업체인 동방아그로를 시작으로, 아주IB투자(12일), 진성티이씨(19일), 에스앤에스텍(26일), 국도화학(27일), 삼천당제약(27일), 씨앤지하이테크(28일), 수젠텍(29일) 등이 8월 중에 자사주 기반 EB 발행을 공시했다.

이달 들어서도 지난 2일에는 대원제약과 엠케이전자, 3일에는 LS 계열사인 INVENI, 4일에는 하림지주, 5일에는 휴맥스홀딩스와 신화콘텍, 9일에는 농기계제조업체인 대동이 자사주를 교환대상으로 하는 EB 발행을 공시했다.

DB하이텍의 자사주 교환사채 관련 10일 공시


10일에는 DB그룹 계열사인 DB하이텍이 보유 자사주 활용계획을 발표하면서 보유 자사주 89만4천주를 이달말까지 소각하고, 44만주는 내년 이후 종업원보상및 사내근로복지기금에 출연하는 것과 함께 이달 이후 자사주 222만주를 교환대상으로 하는 EB도 발행하겠다고 공시했다.

정확한 EB 발행 일자 등은 아직 밝히지 않았다. 다만 DB하이텍은 자사주 EB만 발행하는게 아니라 소각과 종업원 보상용으로도 보유 자사주를 일부 할애했다. 정부여당 눈치도 살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19일 발행을 공시한 건설중장비 부품업체 진성티이씨도 보유 자사주 11.11% 중 5.55%는 EB 발행에 동원하되 2% 44만9645주는 9월5일 소각하겠다고 공시한 바 있다. 그나마 여론이나 정부여당 눈치를 의식하는 기업들이라고 볼 수 있다.

진성티이씨의 자사주 소각 공시


하지만 다른 대부분의 자사주 기반 EB 발행기업들은 거액 회사자금을 들여 쌓아둔 자사주가 강제 소각당하느니 그 전에 서둘러 피하고 보자는 기색들이 역력했다.

보유 중인 자사주 전량 또는 거의 대부분을 이번에 EB 발행으로 처분하는 기업들이 대부분이고, 또 대부분 최근 2~3년간 자사주 처분이 거의 없었던 기업들이란 점이 그 뚜렷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보유 자사주를 이번에 아예 전량 처분하는 기업은 하림지주, 엠케이전자, 대원제약, 수젠텍, 씨앤지하이테크, 국도화학, 아주IB투자 등 7개에 달한다. 또 INVENI, 휴맥스홀딩스, 신화콘텍, 수젠텍, 쌔인지하이테크, 삼천당제약, 국도화학, 동방아그로 등 8개사는 적어도 최근 3년간 자사주 처분이 단 한주도 없었던 기업들이다.

SKC와 진성티이씨도 각각 임직원 인센티브와 서울대 기증분의 소규모 자사주 처분을 제외하면 최근 3년간 대량 자사주 처분이 없었다.

나머지 기업들 대부분도 이번에 보유 자사주를 전량은 아니지만 거의 얼마 안남기고 모두 정리하는 편이고, 또 최근 2~3년간 자사주 대량 처분이 사실상 없었다고 볼 수 있는 기업들이다.

하림지주의 자사주 전량 처분 공시


또 이번에 모든 EB 발행 기업들이 발행 목적을 설비투자나 운영자금, 채무상환자금용이라고 밝혔지만 그 진위가 의심스런 경우가 많았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2023년 용인공장 시설자금용으로 자사주 20만주를 처분한데 이어 이번에는 올 연말까지 EUV용 블랭크마스크 양산 준비를 위해 EB 발행에 자사주 62만주를 처분한다고 구체적으로 밝힌 에스앤에스텍 정도만 어느 정도 고개가 끄덕여질 뿐 나머지 기업 대부분은 용도 자체가 불분명해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급한 시설자금이나 운영자금이라면 올들어 최근까지 다른 다급한 움직임이 있었어야 하는데 대부분 그런 움직임들이 없었고, 최근 2~3년간 자사주 대량 처분이 대부분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아도 다른 급한 용도는 없어 보인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자사주 교환 청구 시작을 EB 발행일(납입일)로부터 대부분 1~2주 이내, 길어냐 한달 이내로 잡은 점도 이번 EB 발행 기업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휴맥스홀딩스와 삼천당제약, 국도화학, 에스앤에스텍의 경우 발행 불과 하루 후부터 교환청구가 가능하다. 하림지주도 납입일 9월12일에 교환청구 시작이 9월15일이다. 법개정 전 하루라도 빨리 자사주를 처분해버리려는 다급함이 엿보인다고도 볼 수 있다.

LS 계열사 INVENI의 자사주 취득및 처분 현황 공시


이번 발행 100%가 공모보다 사모 방식을 택하고, NH투자증권이나 신한투자증권 같은 증권사들과 사모펀드들이 EB를 대부분 인수한 점도 눈길을 끈다.

사모 발행은 증권신고서 제출이 면제되는 등 상대적으로 신속하게 발행업무를 끝낼 수 있다. 증권사및 사모펀드들과의 거래도 보안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신속히 매각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때문에 ‘증권사들이 수수료 수입에 눈이 멀어 주주가치 훼손 같은 EB 발행의 문제점 등은 따지지 않은 채 EB 발행 마케팅에만 여념이 없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모두 그러진 않겠지만 이 중에는 사모펀드를 이용한 사실상의 ‘파킹 거래’가 있는게 아니냐는 지적도 없지 않다. 법 개정을 피해 자사주를 사모펀드에 사실상 숨겨두려는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자사주 EB 발행으로 일반 주주들의 보유 주식 가치가 이미 훼손됐다는 지적들도 있다. EB 발행 결과 채권매각 대금은 회사로 유입되겠지만, 주주환원용으로 써야할 자사주가 기업 운영자금이나 시설자금 등으로 바뀌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은 이들의 꼼수의도는 뻔히 알겠지만 지금의 거래들이 불법은 아니어서 마땅히 제재할 방법은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여당 일각에서 이같은 꼼수 의도를 눈치 채고 정부 쪽에 현장 지도나 강력한 경고 등을 주문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주목된다.

이들보다 자사주 비중이 더 높은 상장기업들의 향후 움직임도 관심거리다. 대형 그룹 지주사 중에는 SK와 롯데지주가 자사주 비율이 높기로 유명하고, 인포바인, 신영증권, 티와이홀딩스, 미래에셋생명, 미래에셋증권 등도 자사주 보유량이 많다. 인포바인의 자사주 비중은 50%를 넘는다.

이들도 나름 관련 대책을 수립 중이겠지만 아직까지 표면적인 움직임은 없다. 하지만 이번 정기국회 시즌 중 법개정이 본격화할 경우 이들 역시 본격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