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천NCC 공장


더트래커 = 김상년 기자

DL그룹 석유화학 자회사인 DL케미칼은 여천NCC에 지난 8월 긴급 대여한 1500억원을 출자전환한다고 지난 20일 공시했다.

출자전환으로 취득하게 될 여천NCC 주식은 773만6345주로, 취득 후 여천NCC 지분율은 50%를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고 밝혔다. 취득예정 일자는 오는 26일이다.

여천NCC는 에틸렌과 프로필렌 등 석유화학제품 기초원료 취득 목적으로 1999년 DL케미칼과 한화그룹 한화솔루션이 50대50으로 세운 회사다. 석유화학 경기 하강으로 여천NCC가 계속된 적자와 자금난 등으로 신용등급 강등위기에까지 몰리자 지난 3월 양 사는 여천NCC에 2천억원의 긴급 유상증자 지원을 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지원에도 지난 8월 여천NCC가 다시 자금난에 쪼달리고, 정부와 여론도 양 그룹의 추가지원을 압박하자 양 그룹은 추가출자 대신 각각 1500억원씩을 여천NCC에 대여, 일단 부도를 막았다.

여천NCC 요약연결손익계산서


이번 공시에서 DL케미칼이 출자전환 후에도 지분 50%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고 밝힌 것으로 보아 한화솔루션도 대여금 출자전환에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한화솔루션은 20일 오후 현재까지 아직 출자전환 공시를 않고 있다. 양 그룹은 연내 출자 전환 확정과 함께 여천NCC로부터 받는 원료 공급 가격에 대한 협상도 연말까지 최종 확정하기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진다.

양 그룹의 이같은 방침은 올 연말로 예정된 정부의 석유화학업계 감산 및 구조조정 계획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지난 8월 석유화학산업의 구조개편계획을 발표하고 올 연말까지 업계 자구책을 마련하도록 통보한 바 있다. 특히 270만~370만톤 규모의 나프타분해시설(NCC)을 자율적으로 감축하라는 것이 이 대책의 골자다.

여천NCC 생산능력 추이


정부 감산유도의 제1 타깃으로 지목되는 여수NCC는 지난 8월 여수 3공장 에틸렌 생산공장 가동을 중단, 이미 에틸렌 연간생산능력을 57만5천톤이나 줄였다. 프로필렌 등 다른 생산설비도 많이 줄여 전체 생산능력이 작년 말 558만9천톤에서 지난 9월 말 419만1750톤으로, 139만7250톤이나 줄었다.

문제는 재무상태다. 여천NCC 분기보고서를 보면 지난 9월 말 단기차입금 잔액은 1조1634억원으로, 작년 말 6041억원보다 5600억원 가량 더 늘었다. 3월 유상증자에도 불구하고 8월 2차 지원을 증자가 아닌 차입금으로 받은 영향이 컸다. 수출입은행 등의 단기차입금도 3천억원 가량 늘었다.

이렇게 늘어난 단기차입금으로 만기가 돌아온 회사채 4천억원 가량을 우선 갚았다. 연 4.6%의 단기차입금으로 금리가 더 싼 회사채 등 장기차입금부터 먼저 갚은 것은 회사채부터 우선 줄이자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신용평가와 한국기업평가는 여천NCC에 아직 A급(실제 A-부정적)의 신용등급을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실제 시장 평가와 아주 동떨어진 등급 부여라고 볼 수 있다. 이 회사의 최근 회사채 유통금리는 여전히 10%를 넘는다. 채무불이행(디폴트) 위험 등이 회사채 유통금리에 상당 부분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천NCC 차입금 내역


4년 전 발행금리 연 2.0087%로 발행됐던 만기 5년 회사채 유통금리는 지난 14일 연 13.08%를 기록하기도 했다. 한창 위가가 고조됐던 지난 8월에 비하면 약간 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B급 기업들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이다.

이 때문에 신용평가사들 입장에선 “신용등급 강등조건이 이미 충족됐다”는 내부평가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등급이 강등될 경우 ‘트리거 조항’이 걸림돌이다. 신용등급이 떨어지면 곧바로 수백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즉시 상환해야하기 때문이다.

부채비율 400% 이하를 유지하지 못할 경우 신용등급 강등은 물론 내년 3월이 만기인 21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즉각 상환해야하는 재무비율 준수의무도 있다. 지난 9월 말 부채비율은 346%로, 작년 말 331%보다 오히려 더 높아졌다. 현재 부채비율은 그보다 더 높아져 ‘트리거’ 400%선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대주주 양 사가 빌려준 대여금 3천억원의 영향이 크다.

여천NCC 공장 가동율


이런 다급한 상황이 이번 출자전환의 주 이유로 알려진다. 차입금 축소 등으로 재무구조가 안정화되지 않으면 여천NCC 발행 채권을 조기에 상환해야 하는 트리거 조항에 걸리는 것은 물론 정부의 구조조정 및 자구노력 강화 방침과도 어긋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채비율이 분기 말 기준으로 확정되는 점을 감안하면 늦어도 올 4분기 재무제표를 공시하기 전까지는 부채비율을 안정권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DL과 한화는 그동안 난항을 겪어온 원료 공급 가격 협상과 관련해서는 외부 컨설팅 기업에 용역을 맡겨 적정 가격을 산정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진다. 양 사는 컨설팅 결과를 수용해 연내 최종 계약을 체결할 계획이다.

원료 공급 가격은 여천NCC의 원가 구조와 수익성을 좌우하는 핵심 계약이다. 올 1~9월 실적만 따져도 여천NCC는 한화와 DL계열사들에서 각각 매출의 30% 및 20%를 올리고 있다. 에틸렌과 프로필렌 같은 석유화학제품을 양 그룹에 대량 공급하고 있다.

기존 계약이 작년 말 만료돼 단가를 재산정해야 하지만 양대 주주가 서로 “(상대편이) 저가로 물량을 공급받아 여천NCC의 수익성이 악화했다”고 주장해 1년 가까이 논의에 진척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 여천NCC의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을 주축으로 채권단이 협상을 서둘러 마무리할 것을 주문하면서 협상에 속도가 나고 있다고 한다. 산은은 한화와 DL에 “양 사 간 논의가 계속 지지부진하니 에틸렌 적정가 산정을 제3자에게 맡겨 해결하라”는 요구까지 한 것으로 알려진다.

여천NCC가 생산한 에틸렌 등의 제품가격 추이


시장에서는 협상 지연으로 여천NCC의 현금 흐름과 재무상태가 다시 더 악화되면 출자 전환이 되더라도 신용등급 리스크가 다시 불거질 수 있는 만큼 산은이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는 것으로 보고있다.

양 사는 외부 컨설팅 계약을 조만간 체결해 이견을 정리하겠다고 산은에 답한 것으로 알려진다. 양 그룹 모두 채권단과 정부가 요구하는 컨설팅 결과에 반발하거나 계약을 또 미루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 두 과제가 해결되면 여천NCC 재무구조가 더 악화하는 일은 막게 되겠지만 대주주의 고통 분담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시각도 여전히 많다. 석유화학 산업단지들 중 여천NCC가 있는 여수 산단의 사업 재편 논의가 가장 더디다는 평가가 많기 때문이다. 연말을 기점으로 여천NCC는 추가 감산을 하거나 다른 석유화학 대기업과의 통합 등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