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선 현대비앤지스틸 대표(홈페이지)

더트래커 = 김상년 기자

현대제철은 지난 24일 이사회를 열고 보유 중이던 종속 자회사 현대비앤지스틸 주식 150만7881주를 주당 15408원, 232억원에 정일선 현대비앤지스틸 대표이사에게 매각하기로 결의했다고 공시했다.

매각 예정일자는 8월25일, 매각 방식은 장외 처분 방식이다. 처분 후 현대제철의 현대비앤지스틸 지분은 41.1%에서 31.1%로 감소한다고 밝혔다. 처분단가는 주식매매계약 체결일(24일) 종가의 20% 할증 적용 금액이라고 설명했다.

처분 목적은 유동성 확보다. 실제 현대제철은 현재 글로벌 철강 경기침체로 영업 적자까지 겪으며 보유자산 매각 등의 구조조정이 한창이다.

지난 24일 현대제철의 관련 공시

스테인리스 냉연강판 제조업체인 현대비앤지스틸의 현재 최대주주는 현대제철(41.1%)이다. 그 다음 대주주들은 정일선 대표(2.52%), 정 대표 바로 밑 동생인 정문선 현대비앤지스틸 부사장(1.74%), 정 대표가 지분 100%를 갖고있는 현대머티리얼(0.6%) 등의 순이다.

8월25일 정 대표가 잔금 입금을 완료하면 정 대표의 지분율은 12.4%로 크게 상승하게 된다. 정일선 형제와 정일선 기업의 지분율을 모두 합치면 14.74%로, 현대제철에 이어 확실한 2대 주주 자리를 확보하게 된다.

1대 주주 현대제철과의 지분차가 여전히 16%포인트 이상이지만 정일선 대표가 갑자기 지분을 10% 이상 크게 늘렸다는 점에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현대비앤지스틸을 사촌동생인 정 대표 일가 몫으로 결국 넘겨주려는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돌고 있다.

현대비앤지스틸이 생산하는 스테인리스 냉연강판은 가전, 운송장비, 건설, 전기기기 등에 널리 쓰이는 고급 강판이다. 이 회사 전체 매출에서 현대차가 올려준 매출 비중은 16%에 이른다. 작년 이 회사는 연결 매출 7954억원에 306억원의 영업이익과 250억원의 당기순익을 각각 올렸다. 고전 중인 모기업 현대제철에 비해 아직 견실한 편이라 할 수 있다.

현대비앤지스틸의 주주 구성

정일선 형제 일가는 현대그룹 창업자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4남이자,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2남)의 친동생인 고 정몽우 전 현대알루미늄 회장 가문이다. 정몽우 회장은 오랜 지병 등으로 고생하다 45세에 작고했다.

동생과 제수씨, 조카들이 애처로웠던지 정몽구 명예회장은 오래 전부터 조카들에게 현대자동차 납품업체인 현대비앤지스틸 경영을 사실상 맡겼다. 고 정몽우 회장 장남인 정일선 대표(55)는 기아차 기획실 이사를 거쳐 24년 째 현대비앤지스틸에 재직 중이다.

바로 밑 동생인 정문선 부사장(51)의 현대비앤지스틸 근무 이력도 23년6개월이 넘는다. 정 대표의 작년 이 회사 대표이사 연봉은 20.46억원, 정 부사장 연봉은 9.82억원 씩이었다.

정 대표는 철과 비철금속 수출입 및 운송업체인 현대머티리얼 지분 100%도 갖고 있다. 사실상 개인기업이다. 다만 현대차그룹 계열사들과 거래가 적지 않고, 정 대표 본인이 현대비앤지스틸 대표인 이유 등으로 현대차 계열사로도 분류된다.

현대머티어리얼은 역시 현대차 계열사인 현대첨단소재 등 13개의 종속 자회사들을 거느리고 있다. 슬로바키아, 체코, 러시아, 멕시코, 미국 등 해외 자회사들이 많다. 현대차 계열사들이면서도 독립된 소그룹으로 보면 된다.

현대머티리얼 소그룹의 경영실적은 쏠쏠한 편이다. 작년 말 연결 자산 3006억원, 이익잉여금 994억원, 자본총계 1065억원에 작년 매출은 8261억원, 영업이익은 358억원, 당기순익은 253억원을 각각 기록했다. 이 중 현대차 계열사들이 작년에 올려준 매출은 242억원 정도다.

정문선 부사장은 현대엔터프라이즈란 또 다른 현대차 계열사의 지분 100%와 이 회사 대표이사 직도 갖고 있다. 종업원 1명에 작년 말 자산 13.7억원, 작년 매출 1억원에 불과한 작은 회사다.

정리하자면 두 형제는 큰아버지 및 사촌 형의 배려에다 본인들의 경영능력 등도 인정받아 현대비앤지스틸이란 꽤 큰 현대차그룹 계열사 경영을 오랜 기간 책임지고 있고, 자신들의 소그룹도 그런대로 잘 꾸려오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다.

2024년 현대비앤지스틸의 5억 이상 연봉 지급자 중 상위 5명 명단

하지만 두 형제에게는 ‘아픈 손가락’인 남동생이 한 사람 더 있다. 범(汎)현대 계열 건설사로 잘 알려졌던 HN Inc(에이치엔아이앤씨) 법정관리로 뉴스에 자주 등장했던 정대선 전 대표(48)다. 노현정 전 KBS아나운서의 남편이기도 해 더 뉴스를 많이 탔다.

HN Inc는 정대선씨가 대표이사 사장이자 최대주주(지분율 81%)였던 기업이다. 오랜 기간 현대차그룹 계열사 경영에 참여해온 두 형들과 달리 31세 때인 2008년부터 독자적으로 일궈 온 기업이다.

정 전 대표는 처음에는 독자 IT서비스 계열사가 없는 현대중공업과 한라, KCC 등 현대 방계그룹들에 IT서비스를 제공할 목적으로 IT서비스 회사를 인수하고 키웠다고 한다. 하지만 곧 사명을 ‘현대BS&C’로 바꾸고, 건설-부동산업으로도 진출했다. 짓는 아파트와 오피스텔, 주상복합 등에 ‘현대썬앤빌’과 ‘헤리엇’등의 자체 브랜드도 붙여 꽤 이름을 알렸다.

이 과정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현대건설, 현대엔지니어링 등의 건설회사를 갖고 있는 현대차그룹과 소송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현대차그룹은 사명에서 ‘현대’를 빼라고 요구했다. 결국 소송에서 져 2021년1월부터 회사 이름을 HN Inc로 바꾸었다.

그래도 2021년까지는 경영실적이 그런대로 괜챦았다. HN Inc는 21년 연결 매출 2837억원에 61억원의 당기순익을 올렸다. 2022년 시공능력평가는 133위였다. 종속 또는 관계기업으로, 코스닥 상장업체인 우수AMS를 비롯, 에이치엔이노밸리, 에이치엔엑스, 에이치엔하이콘 등을 거느렸다. 큰 그룹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알차게 소그룹을 일궜다는 평가를 들었다.

하지만 2022년 하반기부터 금리급등 등으로 시중 자금난이 심해지고 건설경기가 급냉하면서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특히 속초 장사동 테라스하우스 대규모 미분양과 화성 동탄2신도시 주상복합 입주 지연 및 부실시공 사태가 당시 자금 악화의 결정타가 되었다.

결국 2023년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작년 1월 SM그룹 우오현 회장의 둘째 딸 우지영씨의 개인기업인 태초이앤씨에 인수됐다. 우지영씨는 HN Inc에 150억원을 출자해 SM그룹으로 계열 편입한 뒤 태초이앤씨와 합병, HN E&C로 회사 이름을 바꿨다.

결혼 당시 정대선-노현정 전 아나운서 부부

정대선 전 대표 소그룹이 이렇게 될 때 그의 삼촌, 사촌들은 가만 있지는 않았다. 끈끈한 범 현대가 사람들답게 총력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정 전 대표의 두 형들은 물론, 특히 삼촌들인 정몽준 아산재단이사장, 정몽석 현대종합금속 회장과 5촌 당숙인 정몽진 KCC그룹 회장, 그리고 역시 5촌인 HL(옛 한라)그룹 정몽원 회장 등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들은 주로 HN Inc가 보유한 계열사 또는 관계사 주식들을 사주는 방법으로 자금난에 허덕이던 정 전 대표와 HN Inc를 도왔다. 대표적인 회사가 울산 소재 종합IT서비스 및 전기공사업체인 HN이노밸리다.

2021년 말까지 이 회사 주식은 HN Inc가 71%, 정대선 대표가 28.6%를 각각 갖고 있었다. 사실상 정 전 대표 개인회사였다. 하지만 2022년말 이 회사의 주주구성은 확 바뀐다. 정대선 28.6%, HN Inc 12.5%, 정몽준-정몽진-정몽석 각 19.6% 등이다.

HN Inc가 보유하던 HN이노밸리 지분 중 58.8%를 정몽준 등 3인이 사준 것이다. 그러다보니 최대주주도 정대선에서 정몽준 등 3인으로 바뀌었다. 정몽준 등 3인이 이 회사가 탐나서 최대주주가 된것이 아니라 조카 기업의 자금난을 덜어주기위해 지분을 매입해준 것으로 해석됐다.

작년 말 현재 지분은 정대선 28.6%, 정몽준-정몽진-정몽석 각 19.6%. 에이치엔이앤씨 12.5% 등이다. 3촌들과 당숙이 소그룹을 다 잃은 조카에게 이 기업 하나만은 살리면서 개인 최대주주 자리를 지켜준 셈이다.

법정관리 파문에서 거의 모든 회사들을 잃었지만 용케도 이 회사만은 아직 개인 최대주주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 회사도 건설경기 악화의 영향을 받아 아직 결손-자본잠식에 적자 상태다.

올해 초 정 전 대표의 서울 성북동 땅이 법원경매에 붙여졌다는 보도가 아직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빚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건설경기가 살아나면 이 작은 울산 기업이 정 대표 재기의 싹이 될 수도 있다.

무역과 물류사업을 하던 HN엑스나 HN Inc의 IT부문을 따로 떼어내(물적분할) 독립시킨 HN아이엑스도 HN이노밸리와 비슷한 케이스들이다. 다만 HN아이엑스는 삼촌과 당숙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결국 SM그룹으로 넘어갔다.

위에 등장하는 삼촌들과 당숙들 중 정몽준-정몽진 두 사람은 위 3개 기업 지분 인수에 모두 개입했다. 특히 정몽준 이사장의 투입자금이 가장 커 3개사를 모두 합치면 100억원 안팎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정몽준 이사장이 과거 선거 때 유세장을 많이 찾아준 정대선-노현정 부부에 대한 애정과 의리가 남달랐다고나 해야할까?

정몽준 이사장

이들을 제외한 다른 정씨 일가의 개입 흔적은 적어도 회계장부상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정주영 후손 기업들 중 가장 큰 그룹인 현대차그룹과 정의선 회장이 도와준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물론 회계장부에 나타나지 않는 다른 도움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회계장부상에는 기록이 없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정대선 전 대표가 현대차그룹과 벌였던 과거 소송전의 앙금이 아직 남아있는게 아니냐는 추측들도 없지 않았다. 한 재계 관계자는 “당시 정대선 사장이 건설업을 하면서 현대차그룹이 제시한, 넘지 말아야할 선을 일부 넘은게 있어 소송까지 당한게 아니냐는 관측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현대비앤지스틸의 재무상태표및 손익계산서 일부

현대차그룹은 정대선 전 대표와는 과거 소송전까지 벌였지만 정일선-문선 형제와는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비앤지스틸의 경영을 여전히 두 형제에게 맡기고 있고, 현대머티어리얼 그룹과 현대차 계열사들과의 거래관계도 여전히 활발해 보이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 소식에 밝은 재계의 한 관계자는 “정의선 회장과 현대차그룹이 형제에게 20년 이상 현대비앤지스틸 경영을 사실상 맡기고, 이번에 현대비앤지스틸 지분까지 10%나 정일선 대표에게 매각한 것을 보면 정일선-문선 형제에게만은 경영능력을 인정하고 신뢰도 강한 것같다”며 “형제에게 현대비앤지스틸을 완전히 넘겨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정일선 대표의 현대비앤지스틸 연봉이나 자기 기업 현대머티리얼 재무상황 등을 종합 감안할 때 현대비앤지스틸 최대주주가 되기 위한 정 대표의 자금 여력은 충분해 보인다. 정의선 회장의 결심만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