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서울 중구 필동 서진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여정: 틈’전에서 양희진 사진작가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더트래커/임백향 기자


더트래커 = 임백향 기자

사진작가 양희진이 서울 중구 필동 서진아트스페이스에서 개인전 ‘여정(旅程): 틈’을 열고 있다. 6월 3일부터 10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양 작가가 올해 2월부터 집중해온 흑백 필름 작업의 첫 집약점이자, 이전의 화려한 색채 중심 작업과의 명확한 전환을 선언하는 무대다.

서울 중구 필동 서진아트스페이스 출입구에 걸린 ‘여정: 틈’전 포스터. ⓒ사진=더트래커/임백향 기자


전통 의상 한복과 한국 고유의 색감에서 출발해오던 양 작가의 작품 세계는 이제 ‘비워낸 정서’라는 새 질문으로 넘어왔다. “이제는 색을 지움으로써 각자의 기억이 덧입혀질 수 있는 여백을 남기고 싶다”는 그는, 관람자 스스로가 사진 속에 자신만의 감정과 시간을 투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단청의 오방색에서 흑백의 무채색으로, 시각적 서사의 주도권은 이제 작가에서 관람자에게로 옮겨간다.

양희진 사진작가의 ‘여정: 틈’전 작품. ⓒ사진=더트래커/임백향 기자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점은 인물의 존재가 직관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미지들이 많다는 점이다. 작가는 “사진 속 인물은 의도적으로 감추어진 존재로, 소매 끝자락, 실루엣의 흔적, 빛의 잔상으로만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그런 제한된 정보 안에서도 관람자가 ‘그림자 너머’의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를테면 강강술래를 연상시키는 한 장면에는 네 명의 인물이 필름의 중첩으로 얽혀 있다. 인물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장면, 그 틈이 이번 전시의 핵심이다.

양희진 사진작가의 ‘여정: 틈’전 작품 중 모델 정민휘(우측) 출연작. ⓒ사진=더트래커/임백향 기자

현장에서 함께한 모델에 대한 언급도 인상적이다. 양 작가는 “이번 작업에서 모델 정민휘 님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그 몸짓과 섬세함이 독보적이었고, 1층에 걸린 작품은 그 결과물이기도 하다. 회전 동작 하나에도 감정이 살아 있었고, 커머셜 작업에 익숙한 다른 모델들과는 또 다른 결이 느껴졌다. 그 덕분에 저 역시 현장에서 좋은 에너지를 받아 담아낼 수 있었고, 고마운 마음이 크다”고 덧붙였다.

양희진 사진작가의 ‘여정: 틈’전 작품. ⓒ사진=더트래커/임백향 기자


그의 작업은 단지 시각적인 재현이 아니다. 오히려 결여를 통한 복원의 방식에 가깝다. “기억할 만한 가족사진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사진은 저에게 잃어버린 감정과 시간을 되찾는 행위처럼 다가왔다”고 말하는 작가의 사진은 과거의 공백을 향한 개인적 애도의 기록이자, 동시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정서적 아카이빙이다.

사진가로서의 길은 정규 교육이나 체계적인 이력으로 다져진 것이 아니다. 8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아일랜드로 건너가 독학으로 사진을 익힌 그는 처음부터 “예술가”를 자처하지 않았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 단청의 색에 매료되면서 ‘한국적인 것’에 대한 뚜렷한 욕망이 생겼고, 이후 귀국해 한복과 전통 정서를 주제로 한 인물 중심의 사진작업을 본격화했다. 그 색채의 탐색이 결국 색의 제거로 이어진 과정 자체가, 이 작가가 말하는 ‘여정’의 실체다.

양희진 사진작가의 ‘여정: 틈’전 작품. ⓒ사진=더트래커/임백향 기자


그는 지금의 작업을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첫 단계”라고 했다. 다시 말해, 이번 전시는 단지 결과물이 아니라 자신이 ‘작가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중간 보고서이기도 하다.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려 애쓰는 그의 현실적 고백도 인상 깊다. “상업 작업은 여전히 병행하고 있지만, 이 작업은 느리고 조용하게 가는 나만의 복원 방식”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모두 에디션 5점으로 제한해 가치를 지키고자 했으며, 향후 작업 역시 소규모, 저속, 사적인 태도를 유지할 계획이다. 최종적으로는 기억의 틈을 조용히 보관할 수 있는 아카이브 공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언젠가 제목 없던 기억들을 담아둘 수 있는 방, 수집가의 방 같은 곳을 만들고 싶어요. 언제든 누구든 찾아와 기억을 꺼내볼 수 있는 그런 장소요.”

양희진 사진작가의 ‘여정: 틈’전 작품. ⓒ사진=더트래커/임백향 기자


사진은 빛으로 그린 그림이라 했다. 하지만 양희진의 사진은 그보다 더 어두운 곳, 어쩌면 우리 모두의 내면에 숨어 있는 흐릿한 장면들을 조용히 떠올리는, 기억의 복사본에 가깝다. 색을 걷어내고, 정보를 줄이며, 감정과 시간의 여백을 되살리는 이 느린 사진들은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전시명: 여정(旅程): 틈
기간: 2025년 6월 3일 ~ 6월 10일
장소: 서진아트스페이스 (서울 중구 필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