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필리조선소 전경(한화 제공)


더트래커 = 김상년 기자

미국 펜실베니아주에 위치한 필리조선소는 200년이 넘는 미 해군의 발상지로,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 해군 조선업의 핵심 거점으로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던 곳이다. 1801년 미국 해군 조선소로 처음 문을 열었고, 한때 4만명 이상의 근로자들이 근무하며 1.5일에 배 한 척을 만들 정도로 압도적인 군함 건조능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미국 조선 산업이 전반적으로 쇠퇴하면서 필리조선소 역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미 해군 발주 물량이 크게 줄어 민간 상업 조선소로 전환되었으나 한때는 모든 도크가 텅 비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런 틈을 노려 한화그룹은 작년 12월 1억달러(1380억원)라는 비교적 헐값에 이 조선소를 인수했다. 한국 조선업의 첫 미국 진출 사례로, ‘미국 조선업 부활’을 선거공약으로 내건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을 보고 내린 전략적 투자였다.

한화는 인수 후 1년도 안돼 거제에서나 볼 수 있는 최대 하중 660t의 골리앗 크레인을 이미 이곳에 설치했다고 한다. 건조 시간을 단축해 작업효율을 크게 높이려는 목적이다. 도크의 효율성을 크게 높이는 거제식 새 건조공법들도 속속 도입 중이다.

한화은 지난 8월 이 조선소에 약 50억달러(7조원)를 추가 투입, 현재는 연간 1.5척 정도에 불과한 선박건조 능력을 10년내에 10배 이상 확장하겠다고 발표했다. 올 상반기엔 매출 2149억원에 306억원의 반기순손실을 봤지만 거제식 효율성을 접목하면 빠른 시일내 흑자전환이 충분하다고 장담하고 있다.

한화오션의 종속자회사인 미국 필리조선소의 올 상반기 영업실적


이 필리 조선소가 최근 한미정상회담에서 그 이름이 거론되면서 다시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오랜 숙원사업인 핵추진 잠수함 문제를 꺼내며 “우리가 제조 역량은 갖추고 있으니 미국은 핵연료 공급만 해달라”라고 부탁하자 트럼프 미 대통령이 의외로 “좋다”면서도 “단 필리 조선소에서 건조해달라”는 취지로 답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핵추진잠함을 건조하려면 소형 원자로와 농축우라늄 연료부터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해야 하는 등 미국 측 동의가 필수적이다. 2020년 문재인 정부도 미국에 핵잠함 개발 필요성과 계획을 설명하고, 저농축 우라늄을 미국에서 공급받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다. 하지만 핵 비확산원칙을 내세운 미국을 당시에는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던 숙원사업을 이번에는 트럼프가 선뜻 “OK”하면서 “단 건조는 필리 조선소에서 해라”고 역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트럼프의 “OK”에 한국 정치권과 군, 재계 등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지만 ‘필리’ 부분만은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 건조해야 진짜 국산 핵추진 잠수함 아니냐’는 생각이 아직 한국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현재 필리 조선소가 핵추진잠함을 건조할 만한 설비를 갖추고 있지 않은 점도 이런 논란을 부추켰다. 그런 설비를 갖추는데 추가로 많은 돈이 들어가야 되지 않느냐는 논리다.

지난 10월29일의 경주 한미정상회담(대통령실)


지난 7일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핵추진잠수함 건조 장소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그는 "미국에서 건조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며 "우리가 건조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못을 박았다. 불과 1주일 전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듯한 발언이었다.

위 실장은 미국 건조가 현실적이지 않은 이유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필리조선소 잠수함 시설에 투자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며 "제너럴 다이내믹스에 우리 잠수함을 지어달라고 하는 것 역시 현실적이지 않은 방안"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 수요도 충족하지 못하는 사정"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미국내 잠수함 건조능력을 지적하는 얘기다. 실제 현재 미국내에서 잠수함을 건조하는 두 미국 조선소는 포화 상태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있다. 미국은 연간 잠수함 3척 건조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지금은 1척 건조도 버거워하는 상황인데, 위 실장이 이를 콕 찍어 지적한 것이다.

위 실장 발언에 앞서 안규백 국방부 장관도 지난 5일 핵잠함 국내 건조가 합당하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다만 안 장관은 지난 4일 열린 한미안보협의회의(SCM)에서 건조 장소에 대한 협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유동적’이라는 단서를 달긴 했다.

하지만 이틀 뒤 위 실장이 국내 건조 추진을 공식화하면서, 한국 정부의 입장이 더 명확해진 셈이 되었다. 위 실장의 이날 발언은 미국 정부 내부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이견이 어느 정도 정리됐다는 신호가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게 만들었다.

한미정상회담 이후 일주일 넘게 팩트시트가 발표되지 못하자 핵추진잠함 승인을 둘러싼 미국 정부 부처 간 이견이 그 한 원인으로 지목돼 왔다. 미국 국무부, 국방부, 에너지부 등 관련 부처들 사이에서 의견 조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위 실장이 공개적으로 국내건조 방침을 밝히자 미국과의 협의가 상당 부분 진전됐다는 의미로 읽힌 것이다. 위 실장은 핵추진잠함의 규모와 핵연료 농축 비율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위성락 대통령실 안보실장


그는 "버지니아급(7800t)은 우리가 추진할 필요 없는 미국형 (초대형) 잠수함으로 5조원이 넘게 들어간다"며 "우리는 그보다 훨씬 저렴한 우리 수요에 맞는 잠수함을 한국에서 지으려 한다"고 밝혔다.

한국 군은 현재 5000t 이상급 핵추진잠수함 4척 이상을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 미국 버지니아급보다는 조금 작은 규모들이다. 위 실장은 또 핵연료 농축도에 대해서는 "20% 이하로 쓸 것인지, 40%대나 90%대를 쓸지 정한 바는 없다"면서도 "대체로 20% 이하에서 할 수 있다는 쪽"이라고 설명했다.

이 논란의 향방은 조만간 공개될 ‘안보협상 팩트시트(합동 설명자료)’가 가를 전망이다.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 6일 국회 운영위 전체회의에서 “팩트시트 협상이 막바지 단계”라며 “발표는 이번 주를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팩트시트는 지난 주가 다 지났는데도 9일 현재 아직 발표 조짐이 없다. 한국 정부 관계자들의 단언(?)과 달리 미국 정부 내 어딘가에서 아직도 이견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게 아니냐는 관측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안규백 국방부장관


트럼프 대통령은 왜 굳이 ‘필리 조선소’를 찍어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동안 트럼프의 관련 발언들과 미 행정부내 기류를 종합하면 우선 트럼프는 자신의 역점사업인 미국 조선업의 대대적 부활과 한국이 제시한 ‘MASGA(마스가, 한미조선협력프로젝트)’를 연계시켜 ‘필리 조선소’를 언급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미국내 잠수함 건조능력도 포화이고, 또 당신들(한국)이 ’마스가‘하자며 미국에 대대적으로 투자하겠다고 했으니 마스가 자금을 활용, 기왕이면 한국이 인수한 필리조선소에 잠수함 건조시설을 새로 짓고 거기서 한국이 원하는 핵추진잠함을 지으면 될것 아니냐’는 취지의 발언이 아니냐는 추정이다.

그렇게 하면 미국도 한국이 원하는 핵추진잠함 관련 기술이나 원자력 협정 개정, 핵연료 공급 등을 모두 해줄 수 있다는 뜻일 가능성이 높다. 또 미국내 잠수함 건조능력도 확대될 수 있으니 서로 ‘윈윈’하는 조건이 아니냐는게 트럼프의 생각일 수 있다.

이와 관련, 최기일 한국방위산업연구소장도 일부 언론인터뷰에서 "트럼프의 요구를 미국중심주의로 해석해야 한다"며 "(OK는 하면서도) 핵연료 재처리에 대한 확답을 내놓지 않았고 기술이전에 대한 확답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필리조선소에 핵추진잠수함을 건조할 시설과 장비를 들여놓고 한국이 대규모 투자를 하라는 요구로 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많은 국내외 전문가들은 또 미국이 핵잠함 관련 핵심기술의 보안 문제와 일본 등 주변국으로의 핵잠함 건조 확산 등도 우려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한국내 친북 또는 친중 세력들에게 핵심기밀이 새 나갈 수 있고, 특히 한국내 건조가 가능해질 경우 일본이나 대만 등 주변국들도 연쇄적으로 자체 핵잠함 건조를 요구해올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런 요인들 때문에 설령 미국이 조만간 발표한다는 팩트시트에서 한국 요구대로 ‘한국내 건조’ 형식을 갖추더라도 앞으로도 여러 구실을 붙여 실질적인 사업 진행은 계속 시간만 끌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일부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미국의 정권 교체라도 있으면 그 가능성은 더 높아질 수 있다.

필리조선소의 선박 건조 모습(한화오션제공)


그래서 이럴 땐 발상의 대전환 같은 것이 필요해 보인다. ‘어차피 미국이 핵연료만 공급해주면 가능한 일이라면 한국에서 건조하면 어떻고, 미국에서 건조하면 어떠냐’는 발상이다. 더군다나 트럼프가 찍은 필리 조선소는 한국 기업이다.

미국 요구대로 미국내에서 만들되 이 기회에 핵연료 재처리나 연료 공급 문제를 깔끔히 해결하고 다른 핵추진잠함 관련 핵심 기술들도 미국서 받을 수 있게 된다면 더 좋은 카드가 아닌가. 그렇게 습득한 기술은 ‘필리’가 한국 조선소이기 때문에 여러 방법으로 국내로도 들여올 수 있다. 시간을 두고 미국과 꾸준히 협상하면 ‘100% 국내 건조’도 달성 못할 일은 아니다.

우리 정부나 업계, 군의 설명 자료들에 따르면 재래식 잠수함 건조 능력은 우리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핵추진잠함을 만들려면 여기에 소형 원자로를 개발해 잠수함에 안착시키야 한다. 국내 원자력산업 수준이 높아 핵연료만 제대로 공급된다면 소형 원자로 개발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개발한 소형 원자로를 재래식 잠수함에 안착시키고 안전성까지 확보하는 기술은 우리가 아직 개발해본 경험이 없다. 미국 측이 ‘필리’에 이 기술을 제공하면 우리의 습득 기간도 훨씬 빨라질 수 있다. 그러면서 이 기회에 미국과의 핵연료 재처리나 공급 문제도 제대로 마무리하면 금상첨화다.

미국과 잘 협상하면 거제 등지에서 핵추진잠함 블록들을 대부분 만들고, 최종 조립은 필리 조선소로 가져가는 방법도 있다. 5000t 급은 국내서 건조하고 ‘버지니아급’은 필리에서 만드는 방안도 미국과 협상해볼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우리 실정에선 불필요하다지만 장래 대양 해군 등을 생각한다면 이 기회에 조금 더 무리해서 버지니아급 1척 정도는 확보해도 괜챦지 않을까?

추가로 들어갈 돈 문제를 걱정하는데, 이것도 미국과 협상해 ‘마스가’ 투자자금 1500억달러를 활용한다면 해결이 가능한 일이다. 어차피 미국에 투자해야할 돈들이고. 한화도 지난 8월 한미정상회담에 맞추어 필리조선소 신규투자를 발표했다. 이 중 적당액을 핵추진잠함 시설투자로 돌리면 미국도 큰 반대가 없을 것으로 본다.

투자비용과 부지만 확보되면 필리 조선소 내에서 밀폐된 지상 작업장과 잠수함의 하중을 견딜 수 있는 지반 공사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한화 측은 설명한다. 잠수함 건조용 부지도 ‘필리’내에 충분히 있다고 한다.

아무튼 미국이 팩트시트 발표 과정 등에서 우리 측 요구를 100% 들어준다면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앞으로도 계속 이 문제로 신경전을 벌여야 한다면 이같은 ‘발상의 전환’도 한번 고려해보자는 얘기다.

버지니아급 핵잠수함


한편 이 문제를 지켜보며 작년 12월 한화의 필리 조선소 인수가 한화그룹이 만들어낸 ‘신의 한수’라는 생각도 떨칠 수 없다.

필리 조선소를 바탕으로 우리가 ‘마스가’를 미국에 제안했고, 이것이 한미 관세협상 타결에 큰 효자 역할을 했다. 이제는 도저히 풀리기 어려울 것 같았던 핵추진잠수함 건조문제도 미국 대통령이 ‘필리’를 언급하면서 해결 국면에 들어섰다.

‘필리’는 앞으로도 ‘한미동맹강화의 아이콘’같은 역할을 계속 할것으로 보인다. 핵추진잠함을 비롯한 미국 고급 군함 기술을 배우고 원자력협정을 개정할 절호의 기회다. 앞으로도 혹시 있을지 모를 미국의 또 다른 압력카드 등을 무마시킬 수 있는 회심의 카드가 될 수도 있다.

‘필리’가 미국 상선까지 대량 건조할 조선소로 크게 확대되면 대미투자에서도 큰 이득을 볼 수 있다. 앞으로도 여러 용도로 쓸 수 있는 회심의 카드라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