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증권가


더트래커 = 김상년 기자

종합병원과 한의원, 대형학원을 운영하는 재력가들이 1000억원의 자금을 끌어모아 무려 1년 9개월 동안 극소수 종목의 주가를 조작해 400억원의 부당 이득을 챙긴 사례가 당국에 적발됐다.

2023년 8개 종목이 나흘간 폭락했던 이른바 ‘라덕연 사태’와 비슷한 주가 조작 수법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여러 번 강조한 주식시장 불공정거래 척결을 위해 출범한 합동대응단의 1호 사건으로, '주가조작 패가망신' 첫 사례가 될지 주목된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한국거래소가 함께 참여한 ‘주가조작 근절 합동대응단’은 1천억원 이상의 자금을 동원해 작년 초부터 지금까지 약 1년9개월 동안 조직적으로 시세를 조종해 온 대형 작전세력 7명을 적발해 주가 조작에 이용된 수십 개 계좌를 지급 정지 조치하고 혐의자의 자택과 사무실 등 10여 곳을 압수 수색했다고 23일 발표했다.

이들의 부당이득액은 400억원이며, 실제 취득한 시세 차익만 23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주식평가액은 1천억원이 넘는 것으로 파악됐다.

발표 내용에 따르면 종합병원과 한의원, 대형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재력가들은 금융권 대출과 주식담보대출은 물론 법인 자금 등을 활용, 1000억원 규모의 시세조종 자금을 마련해 금융사 지점장, 자산운용사 임원, 유명 사모펀드의 전직 임원 등에게 넘겼다.

이들은 유통주식수가 부족해 거래량이 적은 극소수 종목을 주가조작 대상으로 정하고, 미리 짜고 주식을 높은 가격에 사주는 가장·통정매매 주문을 수만회 제출한 뒤 단기간 체결시키는 수법을 썼다. 거래가 성황을 이루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해 다른 투자자들을 현혹한 것이다.

혐의기간 중 거의 매일 시세조종 주문을 제출하는 등 집요하고 적극적인 주가조작에 나섰다고 한다. 혐의자 매수 주문량이 많을 때는 거래 전체의 약 30%를 차지할 정도였다.

매일 같이 이뤄진 주가 조작에 해당 종목의 주가는 2배 수준으로 올랐다. 특히 이들은 금융당국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수십 개의 계좌를 통해 분산 매매하고, 주문 IP(인터넷주소)를 조작하는 한편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경영권 분쟁 상황을 활용한 정황도 발견됐다.

해당 사건은 금감원이 처음 포착해 합동대응단에 이첩됐다. 금융위는 강제조사권을 활용해 혐의자의 주거지와 사무실을 압수 수색하고, 혐의자들의 금융 계좌를 즉시 지급 정지했다. 금융위 산하 증권선물위원회는 주가조작에 이용된 수십 개 계좌에 대해 자본시장법에 지난 4월 도입된 지급정지 조치를 최초로 시행했다고 밝혔다. 불법이익 환수와 자본시장 피해 최소화를 위한 조치다.

금융위가 공개한 주가조작 수법도


이승우 주가조작 근절합동대응단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한국거래소와 금융감독원이 올해 초부터 이상 징후를 판단해 각각 시장감시 차원에서 접근했고, 금감원이 3월께 먼저 기획조사에 착수했다"며 "혐의자 등 규모가 추가로 더 늘어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합동대응단은 "명망 있는 사업가와 의료인, 금융 전문가 등 소위 '엘리트 그룹'이 공모한 치밀하고 지능적인 대형 주가조작 범죄를 합동대응단의 공조로 진행 단계에서 중단시킨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 당국은 “이들이 취득한 불법 재산에 대해 최대 2배에 달하는 과징금을 부과해 ‘주가 조작은 패가망신’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금융투자상품 거래와 임원 선임을 제한하는 행정제재도 적극적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 사태는 지난 2023년 대성홀딩스·서울가스 등 8종목이 외국계 증권회사인 소시에테제네랄(SG) 창구에서 나온 매물로 폭락하면서 실체가 드러난 라덕연 일당의 주가 조작과 유사하다. 전문직 재력가들을 전주(錢主)로 하고, 금융 당국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소수 종목을 장기간 주가 조작했다.

다만 당국이 신속하게 해당 계좌를 지급 정지하면서, 주가 조작 종목이 폭락하는 양상은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합동대응단은 이번 사건 외에도 중요 불공정거래 사건 4건을 집중 조사 중이다.

이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주가 조작, 부정 공시는 말씀드린 대로 엄격히 처벌해 주가 조작하면 패가망신한다는 걸 확실히 보여주려 한다"고 말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