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트래커 = 김상년 기자
위기에 내몰린 석유화학업계의 구조개편 대수술이 본격화된다. 특히 정부와의 소통 속에서 나프타분해시설(NCC) 생산 능력을 최대 25%, 370만톤까지 대폭 감축하는 방안을 본격 추진하기로 했다.
정부는 각 기업이 연말까지 대규모 감산과 강력한 자구 노력이 담긴 사업 재편안을 마련하라고 통보하고, 이 재편안을 보고 금융, 규제 완화 등의 내용이 담긴 맞춤 지원을 해주겠다는 '선(先) 자구노력, 후(後) 정부 지원' 방침도 업계에 제시했다.
산업통상자원부(이하 산업부)는 20일 오후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10개 석유화학기업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석유화학산업 재도약을 위한 산업계 사업재편 자율협약식」에서 업계의 사업재편 의지를 확인하고, 정부의 산업 구조개편 방향을 이같이 밝혔다.
정부는 이날 오전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를 통해 ▲과잉 설비 감축 및 고부가 스페셜티 제품으로의 전환, ▲재무 건전성 확보, ▲지역경제ㆍ고용영향 최소화 등 ‘석유화학업계 구조개편 3대 방향’을 확정한 바 있다.
또 ▲3개 석유화학 산업단지를 대상으로 구조개편 동시 추진, ▲충분한 자구노력 및 타당성 있는 사업재편계획 마련, ▲정부의 종합지원 패키지 마련 등 ‘정부지원 3대 원칙’도 확정했다.
협약식에서 석유화학 업계는 산업계 자율컨설팅 결과를 반영해 ▲270만~370만톤규모의 나프타분해시설(NCC; Naphtha Cracking Center) 감축, ▲고부가ㆍ친환경 제품으로의 전환, ▲지역경제 및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 최소화 등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같은 NCC 감축량 목표는 현재 국내 전체 NCC 생산능력 1470만t의 18∼25%에 해당하는 양이다. 이 목표 수치는 한국화학산업협회가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을 통해 진행한 컨설팅 용역을 바탕으로 도출됐다.
이번 자율협약을 토대로 석유화학기업들은 설비 감축·고부가 전환을 통한 경쟁력 강화, 재무구조 개선 등을 포함하는 사업재편계획을 연말까지 마련해야 한다.
이날 협약식은 석유화학 업계 스스로 구조적 불황을 극복하고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다짐 차원에서 마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석유화학산업의 구조적 전환기를 맞아, ▲산업계가 자율적으로 선제적 사업재편 의지를 밝히는 한편, 그동안의 버티기 전략에서 벗어나, ▲구조개편에 본격 시동을 걸기로 약속하는 자리라고 볼 수 있다.
정부도 향후 업계가 제출할 사업재편계획의 타당성과 기업들의 자구노력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 이에 필요한 금융, 세제, R&D, 규제완화 등의 지원패키지를 마련해 뒷받침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사업재편이 신속히 이행될 수 있도록 민관이 함께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특히 산업부는 지역경제 및 고용 충격 완화를 위해 지난 5월 여수시를 산업위기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한 데 이어 서산시도 추가 지정을 검토 중이다.
고용노동부도 최근 고용위기선제대응지역 제도를 신설, 8월 19일 고용정책심의회를 통해 여수시를 지정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앞으로 여수시는 고용유지지원금, 생활안정자금 융자 등에 대한 요건 및 수준을 달리해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날 협약식에서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우리 석유화학 산업이 미래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과감하고 신속한 구조개편만이 유일한 돌파구”라고 강조하며,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우리 기업들도 사업재편에 적극 나서줄 것”을 당부했다.
김 장관은 이어 산업계가 한마음으로 진정성있게 노력한다면, 정부도 그에 상응해 뒷받침하는 「선(先) 자구노력 - 후(後) 정부지원」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책임있는 자구노력 없이 정부 지원으로 연명하려 하거나, 다른 기업들 설비감축의 혜택만을 누리려는 무임승차 기업에게는 단호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정부의 압력에도 감산에 소극적이고, 시간을 최대한 질질 끌면서 버티기해온 석유화학기업들이 적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날 협약내용도 그동안 산업부와 각 기업 간 협의를 통해 마련된 것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정부가 연말까지 각 기업에 감산을 핵심으로 한 사업 재편안을 들고 오라고 이날 최후 통첩한 것이라는 해석도 많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도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국내 석화 업계는 그동안 문제를 외면해 왔다"며 "중국·중동 등 글로벌 공급과잉이 예고됐음에도 국내 업계는 과거 호황에 취해 오히려 설비를 증설했고, 고부가 전환까지 실기하며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위기 극복의 해답은 분명하다. 과잉 설비 감축과 근본적 경쟁력 제고."라며 "'버티면 된다', '소나기만 피하면 된다'는 안이한 인식으로는 당면한 위기를 절대 극복할 수 없다.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구 부총리는 "이제 구체적인 계획을 업계 스스로 신속히 마련해야 한다"며 "기업과 대주주가 뼈를 깎는 자구노력을 토대로, 구속력 있는 사업 재편 및 경쟁력 강화 계획을 빠르게 제시해야 한다. 연말이 아니라 당장 다음 달이라도 계획을 제출하겠다는 각오로 속도감 있게 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 "업계가 제출한 계획이 진정성 있다고 판단되면, 규제 완화, 금융, 세제 등 종합대책을 적기에 마련해 지원하겠다"며 "반면 사업재편을 미루거나, 무임승차하려는 기업에 대해서는정부 지원대상에서 배제하는 등 단호히 대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 부총리는 "우리에게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조선업'이라는 좋은 선례가 있다"며 "고통스럽겠지만 조선업의 발자취를 따라간다면, 석유화학산업도 화려하게 재도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앞으로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를 수시로 개최해 사업재편 진행상황을 면밀히 살피고, 필요한 조치를 적기에 마련한다는 방침이다.